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의 진예(塵穢,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精氣)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榛穢除盡精氣入, 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스님에게는 차(茶)와 선(禪)이 둘이 아니고, 시(詩)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詩)와 선(禪)이 둘이 아니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곡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한국의 다경이라 불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우리의 차를 예찬하고 다도의 멋을 전하였으며, 범패와 원예 및 서예뿐만 아니라,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이는 실사구시를 표방한 정약용의 영향과 김정희와의 교유(交遊)에서 얻은 힘이라고 보고 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禪)과 교(敎)의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초의에 있어서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해야한다고 강조한다. 한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초의의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로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 했으니 그에게는 선과 차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서가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