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대덕-13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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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대덕-13대종사

13대종사 조선시대 선풍을 중흥시킨 서산대사를 받드는 대흥사는 억불시대인 조선조에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서산대사의 문도와 법손인 이들 스님들은 조선 후기의 대흥사가 불교계의 중심 사찰의 하나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문도들은 크게 4파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송운 유정계와 편양 언기계, 소요 태능계, 정관 일선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흥사에 있었던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 스님들이었다.
이들 13대종사는 아래와 같다.

풍담 의심(楓潭 義諶 )1592~1665
조선 중기의 스님. 호는 풍담(楓潭), 성은 문화 유(柳). 통진(通津) 출신이다. 아버지는 유화춘 (柳華春),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1607년(선조 40) 16세에 성순(性淳)스님에게 출가하여 원철(圓徹)스님에게 계를 받고 공부했으며, 뒤에 편양 언기(鞭羊 彦機)선사에게서 법을 받았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대사의 문하인 기암 법견(奇巖 法堅)스님과 소요 태능(逍遙 太能)스님 등을 찾아 보고, 금강산과 보개산 등에서 언기선사의 부탁으로 <화엄경>, <원각경> 등 대승경전을 연구하여 그 틀린 점을 교정해서 음석(音釋)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1665년(현종 6) 3월 8일 금강산의 정양사(正陽寺)에서 나이 74세, 법랍 58년으로 입적했다.
해남 대흥사에 비석과 부도가 있다.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상봉 정원(霜峰 淨源), 월담 설제(月潭 雪霽), 월저 도안(月渚 道安), 보당 준기(寶幢俊機)스님 등이 뛰어났다.
취여 삼우(醉如 三愚) 1622~1684
스님의 법명은 삼우(三愚), 법호는 취여(醉如)이다.
속성은 정(鄭)씨로서 전남 강진군 보암방(寶岩坊) 구정자(九亭子) 마을 사람이다.
유년시절에 출가, 만덕산 백련사에서 머리를 깎은 이래 전국의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널리 불교경전(經典)들을 섭렵했다. 해운경열(海運敬悅)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으니, 경열스님은 소요태능(逍遙太能)선사의 제자이다.
취여스님는 얼굴빛이 붉고 윤택하였으므로 해운스님이 우스개 삼아 '술취해 있는 사람'[醉如子]이란 뜻으로 취여라는 별호를 내렸다. 취여스님은 담론을 잘 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는 마력를 지니고 있었다.
언젠가 해남 대흥사(대둔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華嚴)의 종지(宗旨)를 부연 설명하는 법회를 열자 이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수백 명이 운집하였다.
이때 한 스님이 밭갈이를 멈추고 농기구를 멘 채 상원루 아래에서 쉬며 취여스님의 강론중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
그는 즉시 메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고 당(堂)으로 올라가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의 죄과(罪過)를 참회하며 불법의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취여스님은 조선 광해군 14년(天啓2, 壬戌, 1622)에 태어나 숙종 10년(康熙23, 甲子, 1684) 6월 5일 입적하였으니 누려온 나이 63세였다. 영정(影幀) 두 폭이 전하는데 하나는 백련사에, 또 하나는 대흥사에 있다.
화악 문신(華岳 文信) 1629~1707
종사의 법명은 문신(文信), 법호는 화악이며 성은 김씨로 전남 해남의 화산 사람이다.
대흥사(대둔사)에서 출가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으나 바탕이 영민하지 못해 글을 몰랐다. 취여선사와의 인연으로 불법의 오묘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글공부에 정진, 고난 3년만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게 된다.
화악스님은 대흥사(대둔사)를 떠나 제방 선지식들을 찾아 구름처럼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미완성의 지식을 탁마한다. 그후 취여선사로 부터 청허→소요→해운 종사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어 받았다.
화악스님은 국내 제일의 화엄강사로서 스승 취여스님의 강석을 물려받는다. 화악스님이 <화엄경>법회를 열때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 백명에 달했다고 한다.
화악스님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태어나 숙종33년(1707) 6월 26일,나이 79세로 입적했다. 스님의 진영은 대흥사 상원의 영각에 모셔져 있다.
월저 도안(月渚 道安) 1638~1715
월저 대종사는 속성이 유씨(劉氏)요, 기도(箕都 : 지금의 평양) 사람이다. 인조(仁祖) 15년(1638)에 아버지 유보인(劉輔仁)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도안(道安)이라는 법명을 얻었으며 월저는 법호이다. 어렸을 때 천신장로(天信長老)를 은사로 수계하였고 이후 풍담 종사 밑에서 수학하면서 서산대사의 밀전(密傳)을 연구하였다.
27세 때 묘향산에 들어가서 『화엄경』의 대의를 강의하였는데 사람들은 스님을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스님은 특히 불교 뿐 아니라 백가(百家)의 모든 책에 통하지 못하는 바가없었으며 법회 때마다 큰 원력으로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 배포하는 등 교화의 일선에서도 활약하였다.
한때 스님의 명성을 시기한 소인배들의 모략으로 감옥에 갇혔으나 곧 억울함이 밝혀져 어명으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이후 스님은 일정한 거처를 두지 않고 은둔하며 여생을 마쳤다.
숙종 41년(1715) 입적할 때 상서로운 빛이 뻗쳐서 수백 리 밖의 사람까지도 스님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세수는 78세, 법랍은 69년이었다. 문도는 수백이었으나 특히 법명(法明)스님과 추붕(秋鵬)스님이 뛰어났다고 한다.
설암 추붕(雪岩 秋鵬) 1651~1706
스님은 효종 2년(順治 8, 1651) 8월 27일에 태어났다. 스님의 법명은 추붕(秋鵬), 법호는 설암(雪岩)이며 성은 김(金)씨로 평안남도 강동(江東) 사람이다.
강동은 대동강의 중류평야에 임하여 있는 지역으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설암스님이 지은 과문의 원이름은《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으로 2권이 모두 현존하며 다른 하나는《법집별행록절요사기(法集別行錄節要私記)》로 1권인데 일실되었다.
제자 법종(法宗)스님등이 경종 2년(1722)에 편집한《설암잡저(雪岩雜著)》3권 3책과《설암난고(雪岩亂藁)》2권 1책이 전해온다. 대흥사(대둔사) 백설당(白雪堂)에서 법회를 열었던 때의 기록인《화엄강회록(華嚴講會錄)》이 대흥사(대둔사)에 전한다. 홍문관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스님의 비석글을 지었다. 문인은 34명에 이른다.
환성 지안(喚惺 志安) 1664~1729
1664(현종 5년)∼1729(영조 5년).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 성은 정씨(鄭氏). 호는 환성(喚惺), 자는 삼낙(三諾).
춘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단정하였으며,15세때 미지산 용문사(龍門寺)로 출가하였고 상봉정원(霜峰淨原)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17세 때 금강산을 순방하여 월담설제(月潭雪齊)선사를 찾아 법맥을 이어받은뒤, 침식을 잊고 경전을 연구하였다.
1690년 27세 되던 해에 직지사(直指寺)에서 모운진신(慕雲震信)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아 법석에 올랐고 수백명의 학인(學人)에게 강의했는데, 그의 강연은 뜻이 깊고 묘하고 특이한 것들이 많았으므로 의심을 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여러 주석서(註釋書)를 실은 빈 배가 전라도 낙안의 징광사(澄光寺) 부근에 왔는데, 그 주석서들의 내용이 지안스님이 말한 것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탄복하였다. 그뒤 전국의 명산을 순력하고 지리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도인이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명하여 급히 옮기자, 며칠 뒤 그 절이 불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다가 큰비가 쏟아지는 날 절을 떠났는데, 도중에 한 부잣집에서 자고 갈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오두막집에서 잤다.
그날 밤 정양사와 그 부잣집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1725년(영조1년)에는 김제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열었을때 학인(學人) 1,400여명이 모여 강의를 들었다.
1729년(영조5년) 법회 관계의 일로 무고를 받아 호남의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반대파의 의견때문에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도착한지 8일만에 병을 얻어 입적하였다.
입적할 무렵,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山鳴三日 海水騰沸).”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나이 66세, 법랍 51세였다.
대흥사(大興寺)에 비가 있다.
임제종(臨濟宗)의 선지(禪旨)를 철저히 주창한 선사였으며, 조선 후기 화엄사상과 선을 함께 닦는 전통을 남긴 환성파(喚惺派)의 시조이자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의 1인으로도 숭봉되었다.
법맥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체정(體淨)―상언(尙彦)스님 등으로 연결된다.
저서로는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 1권과 《환성시집 喚惺詩集》 1권이 현존한다.
벽하 대우(碧霞 大愚) 1676~1763
스님의 법명은 대우(大愚),법호는 벽하 이며 성씨는 박씨로 전라남도 영암 사람이다.
잉태될 때 부터 특이한 조짐을 보였던 스님은 뒷날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를 결심, 마침내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님은 조연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화악 대사에게서 경교를 배웠으며 환성대사 에게서 선을 이어 받고 고압 선사에게서 계율을 전해 받았다. 경교 공부에 시간을 보냈으며 만년에는 선송에 심취했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2년(1676)에 태어나 영조 39년(1763) 6월에 생애를 마치니 누려 온 나이 88세였다.
설봉 회정(雪峰 懷淨) 1678~1738
스님의 법명은 회정(懷淨),자는 윤중(允中)이며 법호는 설봉,성씨는 조(曹)씨로서 낭주(영암)사람이다.
날 때부터 우아한 골격을 지닌 이 아이는 아홉살이 되자 달마사의 조명(照明)장로를 찾아가 수행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
16세 되던해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마침내 도예를 떨치던 화악문신 대사를 찾아가 대사로 부터 법통을 전해받았다. 스님은 그후 홀로 참구를 거듭, 높은 경지에 다달았으며 또한 외딴섬에 들어가 토굴에서 철저히 정진하기도 했다.
영조 14년(1738)은 스님께서 회갑을 맞는 해인데 이해 9월 8일 입적했다.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
스님의 법명은 체정(體淨), 법호는 호암 이요 성씨는 김씨로 전북 고창군 흥양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에 태어나 영조 24년(1748)에 입적하니 나이 예순 둘,법랍 마흔 일곱이다. 환성 스님에게 법통을 이어 받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주석 했는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따르는 스님들이 늘 수 백명에 달했다.
상월 새봉(霜月 璽封) 1687~1767
스님의 법명은 새봉(璽封), 법호는 상월이며 자는 혼원,성씨는 손씨로서 순천 사람이다.
조선조 숙종 13년(1687)에 태어나 11세 되던 해 조계산 선암사로 들어가 극준(極俊)장로를 의지하여 출가, 15세에 머리깎고 이듬해 세진당의 문신(文信)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세 때 설암선사에게 참학,도가 통하여 의발을 전해 받고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며 지식을 넓혔다.
27세 되던해 조계산으로 돌아왔다.
영조 43년(1766) 10월, 상월 스님은 몸에 가벼운 질병 증세를 느껴 게송 한수를 읊조리기를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하고는 담담하게 입적하니 누려온 나이 81세였다.
함월 해원(涵月 海源) 1691~1770
스님의 법명은 해원(海源),자는 천경(天鏡), 법호는 함월이고 성씨는 이씨이며 함경남도 함흥 사람이다.
어머니 조씨는 꿈에 큰 물고기를 보고 잉태하여 열달이 훨씬지나 아이를 낳았다.
열네 살 되던 해, 도창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이래 두루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 다니며 자신을 탁마하였다. 뒷날 환성 스님을 섬기게 되었는데 입실 10년만에 종문의 묘전을 모두 배웠다.
스님은 조선조 숙종 17년(1691)에 태어나 영조 46년(1770) 8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쇠잔한 진리의 등불을 지키며 교화를 폈던 환성지안(喚惺志安)선사의 의발을 이어받아 전한 당대의 선지식이다.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조선 후기의 고승. 성은 천(千)씨. 자는 무이(無二), 법호는 연담(蓮潭). 전라남도 화순 출신.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세에 <통감(通鑑)>, 12세에 <맹자>를 읽었다.
7세 때 아버지가, 13세 때 어머니가 죽은 뒤 숙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대학>·<중용> 등 유가경전을 공부한 뒤, 18세 때 승달산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스님을 따라 출가하였고, 19세 때 안빈(安賓)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보흥사(普興寺)에서 사집(四集)을 배운 뒤 대둔사(大芚寺) 벽하(碧霞)선사로부터 <능엄경>을, 용암(龍巖)스님 밑에서 <기신론 (起信論)>과 <금강경>을, 취서사(鷲棲寺) 영곡(靈谷)스님으로부터 <원각경(圓覺 經)>을 배웠다.
22세 때 해인사의 체정(體淨)선사 밑에서 3년 동안 공부하여 선리를 터득하였고, 상언(尙彦)스님에게서 <화엄경>을 배우면서 28세까지 시봉(侍奉)하였다.
29세 때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고, 체정선사를 증명사(證明師)로 모셨다.
31세 때 보림사(寶林寺)에서 <반야경>과 <원각경> 을, 다음해에 <현담(玄談)>을 강의하기 시작하여 60세까지 30여년 동안 계속 하였다.
58세 때 영남 종장(宗匠)으로 해인사에 있으면서 서산(西山)선사의 비석을 대흥사(대둔사)에 세웠다.
60세 때 시기하는 승려의 투서 때문에 퇴암(退庵)스님과 함께 수일 동안 투옥된 일이 있었다.
78세 때 보림사 삼성암(三聖庵)으로 옮긴 뒤 80세에 입적하였다. 교학(敎學) 뿐 아니라 선도를 함께 닦은 고승으로서, 법맥상으로 볼 때는 체정선사의 제자이고 상언스님과는 동문이면서 스승으로 받들었다.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을 전수함으로써 선교(禪敎)의 총본산인 해남 대흥사(大興 寺)의 12대종사(大宗師) 중 1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서장사기(書狀私記)> 1권, <도서사기(都序私記)> 1권, <선요사기(禪要私記)> 1권, <절요사기(節要私記)> 1권, <기신사족(起信蛇足)> 1권, <금강하목(金剛蝦目)> 1권, <원각경사기(圓覺經私記)> 2권, <현담사기(玄談私記)> 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 5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염송착병(拈頌着柄)> 2권, <임하록(林下錄)> 등이 있다.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초의선사는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다도(茶道)를 정립하신 분이다. 성은 장씨(張氏)이며, 자는 중부(中孚), 법명은 의순(意恂)으로, 초의는 호이다.
16세에 출가하여 불학 이외에도 유학, 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등과 폭넓게 교류를 가져 시부(詩賦)를 익히기도 하고,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차 생활의 멋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사상 또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좌선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대둔사)의 동쪽 계곡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을 홀로 정진하다 1866년 나이 81세,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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