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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사항

원로의원 천운상원 대종사 원적

1. 우리 종단 원로의원 천운상원 대종사께서 7월 14일 오전 10시 광주 향림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법랍 64세, 세수 79세.

 

2. 천운상원 대종사께서는 입적하시기 전 문도들에게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악한 일 행하지 말고 선행을 받들어 실천하라 그리고 마음을 늘 청정하게 수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는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3. 천운대종사께서는 은사인 종욱스님을 계사로 1947년 평창 월정사에서 사미계를, 1958년 고창 선운사에서 구족계를 각각 수지했으며, 선운사에서 사교과 및 대교과를 마친 후 순천 송광사 자장선원을 비롯 화순 용암사 선원, 영암 도갑사 선원 등 전국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셨고 1990년에는 서옹스님으로부터 전계전법을 받으셨습니다.

 

4. 구례 화엄사와 해남 대흥사 주지, 중앙종회의원, 비상종회의원, 광주사암연합회장, 대흥사 동국선원 조실, 백련사 만덕선원 조실 등을 역임하셨으며 2001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후 2004년 5월 31일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셨습니다.

 

5. 1983년 향림유치원을 시작으로 향림어린이집, 향림사신용협동조합, 향림출판사, 광주불교대학, 사회복지법인 향림원 등을 설립하셨으며, 정신지체장애인 및 노인, 아동보호 전문 생활시설을 운영하셨습니다. 총무원장 공로패와 포교대상, 법무부장관 표창장과 국민포장 등 종단 내외에서 포교 및 사회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포상 및 감사패 등이 50여건에 이르고 있습니다.

 

6. 천운 대종사께서는 평생을 교육과 복지포교에 힘써 오셨습니다. 절에서도 고아들을 따뜻하게 키우시지만, 정광학원을 오늘의 명문학교로 만든 데도 뒷받침을 하셨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스님들이 찾아오면 다른 인연 따지지 않고 흔쾌히 뒷바라지 해주셨으며, 절에서 일하는 종무원 자녀들에게도 교육비를 마련해 주실 정도를 따뜻한 마음을 베푸셨습니다.

 

7. 종단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되는 천운상원 대종사 영결식은 18일 오전 11시 해남 대흥사에서 봉행되며, 분향소는 해남 대흥사(061-534-5502)와 광주 향림사(062-375-7600)에 마련됩니다.

 

 

 

 

遺 訓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악한 일 행하지 말고 선행을 받들어 실천하라

그리고 마음을 늘 청정하게 수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나는 늘 역대 제불의 한결같은 가르침을

마음에 모시고 정진하였다.

이에 문도들은 佛祖의 본분사를 가슴에 새기고

중생 속에서 정토를 성취하는 대승보살행을 실천하기 바란다.

부디 자신을 속이는 중노릇 멀리하고, 서로 화합하며 수행에 매진하기 바란다.

나는 부족한 선근과 복력에도 불구하고 불보살님의 가피 아래 많은 이웃들의 도움과 은혜로 별다른 장애 없이 佛門에서 큰 복락을 구족하였다.

제방의 도반과 향림사 신도님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세세생생 보은할 것이다.

문도들은 대흥사 교구를 전법과 보살행의 복전으로 가꾸어 주기 바란다.

 

 

大韓佛敎曹溪宗 元老議員 天雲堂 尙遠 大宗師 行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천운당(天雲堂) 상원(尙遠) 대종사(大宗師)는 호남불교를 일으킨 개척자이며 현대 도심 포교, 불교 교육, 복지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정립한 선각자였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정화 후 ‘도제양성’, ‘포교’, ‘역경’이라는 종단 3대 지표를 수립 한 직후인 196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가장 취약하던 호남 지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수행자였다. 시민들을 위해 부처님 가르침을 담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천막 법당을 지어 아이들을 위한 법회를 열었으니 미래를 내다보는 스님의 혜안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케 한다.

 

스님은 또 젊은 날에는 당대 최고승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선원과 토굴에서 가행정진했으니 부처님의 제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사셨다. 스님은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말없는 가운데 큰 가르침을 내린 참 스승이셨다.

 

1932년 1월1일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해방이 되었을 때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신학문을 부정하고 한학을 고집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부러웠던 스님은 서울로 도망쳐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떠났다가 마침 길에서 비구니스님을 만나 내장사로 가게 됐다. 그 때가 16살이었다. 내장사에서의 첫 새벽 스님은 도량석으로 울려 퍼지던 ‘화엄경 약찬게’의 청아하면서도 절절한 염불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날 스님의 평생 길을 제시해주는 박한영 스님을 만났다. 당시 팔순의 노스님은 소년의 사연을 듣고 절에서 글을 배우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스님은 그 때부터 한영스님의 시자로 절집 생활을 시작했다. 노스님의 공양상을 챙기고, 측간으로 모시며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 등 고된 시봉을 하면서 아침저녁 예불과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한영스님은 그를 친손자처럼 아끼고 귀여워했다. 스님은 한영스님 이불 밑에서 ‘할아버지’라고 안기며 잠을 잤다. 금봉·진응과 함께 근대불교계 3대 강백으로 추앙받는 박한영스님은 뛰어난 불교학자이며 선사였으며 중앙불교전문학원 교장, 강사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였으며 불교개혁가였다. 또 포교의 중요성을 간파해 이를 널리 펼친 선각자였다. 한영스님의 이같은 수행과 불교관 품성 미래를 읽는 혜안은 알게 모르게 어린 시자에게 전수돼 후일 호남 불교 중흥의 주역을 담당케 한 것이다.

 

내장사 생활 1년 만에 한영스님이 입적하자 그 후 월정사로 옮겨 은사인 지암 이종욱 스님(1884~1969)을 만난다. 이종욱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았다. 12년을 모신 이종욱스님은 천운스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무소유의 삶과 포교도 모두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이다. 스승은 젊은 천운스님에게 “포교하는 사람은 감투 쓰면 안된다. 무소유로 살아라. 여자관계 철두철미해라”는 세 가지를 간곡히 부탁했다. 은사스님 역시 엄하지만 자비로운 분이었다. 천운스님은 생전에 은사스님에 대해 “여든이 넘어서 마흔이 넘은 제자를 비행기 태우며 놀 정도로 허물이 없고 자비로운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제자들의 기억에는 은사 스님이 바로 노스님과 다름없는 선지식이었던 셈이다. 어릴적 어른들을 잘 모셔 사랑을 받았던 어린 시자는 여든이 넘은 노스님이 되어서도 여전히 천진성을 잃지 않고 어린이들과 함께 놀았으니 평생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사셨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친일로 오해받은 사정을 풀기 위해 천운스님은 지암스님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평전을 내며 은사스님의 위업을 널리 선양하는데 앞장섰다. 이를 통해 또 자칫 왜곡 될 뻔 했던 불교계의 항일 독립운동사 한 페이지를 열었으니 이 모두 노스님의 열정이 일궈낸 성과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해 통신병으로 활약하는 한편 군승이 없는 군에서 불교모임을 이끌며 군내 포교를 담당하기도 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은사스님이 입적한 뒤 천운스님은 조계산 토굴, 도갑사·대흥사·선운사 선원 등에서 10여 년간 참선을 했다. 특히 스님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에서 처음 선방을 열어 3~4년 묵언정진을 해냈다. 당시 스님으로는 처음으로 목에 ‘묵언패’를 걸고 정진해 이후 묵언정진하는 수좌들의 길잡이가 됐다. 당신 공부를 하는 한편 화엄사 주지를 맡아 가람을 일신하고 정진 대중을 외호하는 등 이후 포교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토굴과 선원 등지에서 가행 정진하던 스님은 스스로 깨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불법을 널리 펴고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 한국 불교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원력을 갖고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향림사를 열었다. 이 때가 1971년이었다. 스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고 가는 길’이라는 포교지를 만들어 나누어주며 불법을 알렸다. 천막포교당을 세우고 불교 전단지를 배포하는 포교 방법이 서울과 수도권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10여년 뒤였으니 스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짐작케 한다. 스님은 포교를 시작하면서 신도들의 시주를 갚는 길을 고민하며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는 학교를 가지 못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 길을 터주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쉼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 아픈 사람을 위한 문병이었다. 스님은 이 세가지 원칙을 그대로 실천했다. 스님의 교육열이 강해 향림사에서 학기 초 등록금만 1억원이 넘게 지불했다. 장애인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다 아예 장애인 복지관을 만들었으며 아픈 사람을 마음 놓고 치료 하기 위해 한 때 병원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돈은 모두 스님이 전국의 대중들과 만나 법문하고 절 살림을 아껴 모은 소중한 정재였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찬불가를 보급하고 어린이·중고생 법회를 열었다. 또 수련회를 개최했다. 이 모든 것이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되는 대 사건들이었다.

호남불교를 중흥한 스님은 1990년 후반 부터는 대흥사에 머물며 사찰을 중창하고 후학들을 제접했다. 주지를 거쳐 조실을 맡아 스님은 남도의 문화와 정취를 통해 사람들의 심성을 맑히고 보다 차원 높은 불교를 전파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대 까지 스님의 관심은 불교를 알리고 체계를 잡는데 집중했다면 이후 대흥사를 통해서는 내용을 채우고 문화로서 불교를 선양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서산대사 의발이 보존된 사찰로 13대 강사와 13대 종사를 배출한 조계종의 종원(宗元) 사찰로 불리는 대흥사는 한동안 침체했지만 천운스님에 이르러 다시 한번 승풍을 드높이게 된 것이다.

 

스님이 포교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신도교육이었다. 새 신도에게 기초 교리강좌는 물론이고 광주불교대학과 광주불교대학원을 설립, 신도를 교육하는 한편 포교사 육성에 힘을 기울여 전국포교사단 광주.전남지단의 활성화와 함께 향림사를 호남지역 포교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또 전남지방경찰청 경승실장과 광주교도소 교화위원회 불교회장 소임을 맡아 경찰 및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펼쳐 사회의 어두운 곳에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비추는 역할도 수행해 왔다. 복지포교분야에 역점을 둔 스님은 1983년 향림유치원, 1994년 향림사어린이집 , 1996년 해남 한듬어린이집을 설립, 운영하는 등 복지를 겸한 어린이 포교와 함께 92년에는 광주시로부터 우산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모범적인 운영으로 지역사회에서 불교위상을 높여왔다. 이외에도 인근 군부대들을 중심으로 군포교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군불자를 배출했으며 종립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사업에도 헌신하는 한편 향림사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생활 속의 불교를 실현하기도 했다. 이후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향림출판사등을 세워 향림사를 호남 포교의 중심처로 세웠다. 이같은 스님의 노력에 힘입어 침체에 빠져 있던 호남불교는 중흥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향림사에서 스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스님과 재가자들이 호남 불교를 일으키는데 앞장서고 정광중고에서 배출된 청년불자들이 불교를 위해 헌신하면서 호남 불교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94년에는 불교광주방송이 설립되고 96년에는 광주지역 2천여학생이 참가한 대규모수계법회가 열려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스님의 이같은 공을 종단에서도 인정해 스님은 두차례 포교대상을 수상 했다. 또 2001년 조계종 사회복지대상 특별상, 2002년엔 제1회 전국 교정인의 날 국민포장을 품수했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아이들 교육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면서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스님은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처 키우는 일”이라며 아이들이 마음 껏 뛰어놀고 공부하며 무럭무럭 자라도록 보살폈다. 스님에게 아이들은 부처며 화두였다. 아이들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 생전 스님의 말씀이었다. 스님은 힘닿는 대로 상급 학교에 진학시키는 등 뒷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줄 뿐 특별히 강요하는 것도 없었다. 유난히 말썽을 피우는 아이가 있으면 행동이 달라질 때까지 스님 방에서 재우며 키웠다. 40년 동안 이렇게 스님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150여명에 이른다. 대부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라 제 몫을 다하며 이 중 20여명 정도는 출가수행자가 되어 스승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며 한국불교를 지키는 동량이 되었다. 스님은 제자들의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제자들이 원하면 중앙승가대, 동국대는 물론이고 외국유학도 보내줬다.

 

스님은 수행자로서 철저한 모범을 보이되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말없는 가운데 깨우침을 주어 더 크게 깨닫도록 경책하는 방식이 스님의 지도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종을 조장하는 것도 아니다. 말을 하지 않되 자발적으로 깨달아 실천토록 하는 것이 스님의 훈계법이다. 스님은 평소에 엄하고 까다롭지만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계율을 어겼을 때 스승으로서 꾸짖음을 내릴 뿐 결코 상좌나 재가자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제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으로 인해 불편할 까봐 여행을 가거나 성지순례를 가더라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거나 말없이 따르던 분이었다. 스님은 또 엄격하면서도 매우 유머가 넘치는 분이었다. 수행자로서 혹은 종단의 큰 스님으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의 말로, 아이들을 만나면 아이들의 눈으로 사람을 대하고 천진하게 굴었다. 이 때문에 엄격하다는 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재가자들은 스님의 우스개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금세 마음이 풀어져 편안하게 대했다고 스님을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스님은 또 평생 무소유의 정신을 따랐다. 스님은 생전에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간단한 일인데 너무 욕심이 많아 제대로 못 보는 것”이라며 수행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욕심 없는 삶을 강조했다. 스님은 당신은 아끼고 아껴 쓰고 아무것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자비보살이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자상하게 챙겼다. 향림사에서 일하는 재가 불자 47명의 직원 자녀 교육비 일체를 절에서 부담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천운스님의 법문은 쉬우면서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늘 불교의 연기 사상에 입각하면서 누구나 생활과 삶 속에서 지켜야할 윤리와 원칙을 갖고 불교를 설명하고 가르침을 내렸다. 늘 화내지 말고 남의 말 잘 듣고 험담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수행이라며 남 탓 하지 말고 스스로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했다.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였으며 부처님의 올곧은 제자였다. 출가한 이래 조석예불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으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았다. 6시15분에 아침 공양을 마치고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면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친절히 상담했으며 점심공양 후에는 광주불교대학, 사무실, 복지관, 정광학원, 향림원 등을 돌아보는 생활을 입적 전 까지 어긴 적이 없었다.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도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게 곧 불교)라는 부처님의 ‘칠불통게(七佛通偈)’를 강조했다. 수행자의 본분을 가장 중요시 여기시던 평생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현생에서의 몸을 벗어던지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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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전 임충성 2010-07-16 오후 7:35:15 덧글삭제
    대종사 천운큰스님 극낙왕생 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대흥사에 무지게가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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