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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76) <영결식> 행장 소개-지선 스님

 

 

백양사 유나 지선 스님께서 천운대종사의 행장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大韓佛敎曹溪宗 元老議員 天雲堂 尙遠 大宗師 行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천운당(天雲堂) 상원(尙遠) 대종사(大宗師)는 호남불교를 일으킨 개척자이며 현대 도심 포교, 불교 교육과 복지의 물꼬를 트고 방향을 정립한 선각자였습니다.

 

스님은 1960년대 말부터 한국사회에서 불교가 가장 취약하던 호남지역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수행자였습니다.

 

스님은 또 젊은 날에는 당대 최고승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선원과 토굴에서 가행정진했으니 부처님의 제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사셨습니다.

 

엄하면서도 자상하고 말없는 가운데 큰 가르침을 내린 참 스승이셨습니다.

 

1932년 1월 1일 전북 고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소학교를 졸업한 뒤 열 여섯의 나이에 서울로 가서 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새벽에 집을 떠났다가 마침 길에서 비구니 스님을 만나 내장사로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날 스님의 평생 길을 제시해주는 박한영 스님을 만났습니다.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는 등 큰 가르침을 받았으나 1년 만에 한영 스님이 입적하자, 그 후 월정사로 옮겨 지암 이종욱 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계를 받았습니다.

 

12년을 모신 이종욱 스님은 천운스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소유의 삶과 포교에 대한 열정도 모두 스승에게서 받은 가르침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친일로 오해받은 사정을 풀기 위해 천운 스님은 지암 스님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모아 평전을 내며 은사의 위업을 널리 선양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를 통해 또 자칫 왜곡될 뻔 했던 불교계의 항일 독립운동사 한 페이지를 열었으니 이 모두 노스님의 열정이 일궈낸 성과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군승이 없는 군에서 불교모임을 이끌며 군내 포교를 담당하기도 했던 스님은 조계산 토굴, 도갑사․대흥사․선운사 선원 등에서 10여 년간 참선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1년 스님은 불법을 널리 펴고 제대로 된 제자를 키워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히겠다는 원력을 갖고 상무대 근처 허허벌판에 천막을 치고 향림사를 열었습니다.

 

스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알고 가는 길이라는 포교지를 만들어 나누어주며 불법을 알렸습니다. 천막포교당을 세우고 불교 전단지를 배포하는 포교 방법이 서울과 수도권에 등장한 것은 이보다 10여년 뒤였으니 스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스님은 향림사에서 찬불가를 보급하고 어린이·중고생 법회를 열고 수련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에서 신기원으로 기록되는 대사건들이었습니다.

 

스님은 광주불교대학과 대학원을 설립, 신도를 교육하는 한편 포교사 육성에 힘을 기울여 전국포교사단 광주․전남지역단의 활성화와 함께 향림사를 호남지역 포교전진기지로 만들었습니다.

 

스님은 또 향림유치원, 향림사어린이집 , 해남 한듬어린이집을 설립․운영하는 등 복지를 겸한 어린이 포교와 함께 92년에는 광주광역시로부터 우산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모범적인 운영으로 지역사회에서 불교위상을 높여왔습니다.

 

이외에도 인근 군부대들을 중심으로 군포교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군불자를 배출했으며 종립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직을 맡아 교육사업에도 헌신하는 한편 향림사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생활 속의 불교를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향림사에서 스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스님과 재가자들이 호남 불교를 일으키는데 앞장서고 정광중․고에서 배출된 청년불자들이 불교를 위해 헌신하면서 호남불교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이 같은 공로로 두 차례 포교대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 조계종 사회복지대상 특별상, 2002년에 제1회 전국 교정인의 날 국민포장을 품수했습니다.

 

스님은 향림사에서 아이들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처 키우는 일”이라며 40년 동안 150여명을 길러냈습니다.

 

대부분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라 제 몫을 다하며 이 중 20여 명 정도는 출가해 스승의 뒤를 이어 한국불교를 지키는 동량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당신은 아끼고 아껴 쓰고 아무것도 갖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베푸는 자비보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자상하게 챙기셨습니다. 향림사에서 일하는 재가 불자 47명의 직원 자녀 교육비 일체를 절에서 부담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스님은 철저한 수행자였으며 부처님의 올곧은 제자였습니다. 출가한 이래 조석예불 드리는 것을 거른 적이 없으며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6시까지 참선하고 예불 모시고 좌선, 염불, 다라니까지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6시 15분에 아침공양을 마치고 1시간 동안 포행을 하고 나면 줄지어 기다리는 신도들을 만나 친절히 상담했으며 점심공양 후에는 광주불교대학, 사무실, 복지관, 정광학원, 향림원 등을 돌아보는 생활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남긴 유훈에서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면 이게 곧 불교)’라는 부처님의 ‘칠불통게(七佛通偈)’를 강조했습니다.

 

마침내 불기 2554년 양력 7월 14일 오전 10시. 법랍 64세, 세수 79세로 스님이 평생 수행과 포교에 매진해왔던 광주 향림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수행자의 본분을 가장 중요시 여기던 평생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현생에서의 몸을 벗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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